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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호국원 기고) 유엔군 참전의 날을 맞아

기사승인 2020.07.23  17: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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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처음 국립이천호국원에 도착했을 때 나를 맞은 것은 노성산 아래로 짙게 드리운 안개였다.

그 안개는 참전유공자 분들을 모신 국립이천호국원의 봉안담으로 가기 위해 홍살문을 지날 때도 어김없이 내 주변을 맴돌았다. 때로는 완만하기도 가끔은 급하기도 한 산자락의 경사면을 따라 펼쳐진 야외 봉안담과 그곳을 두텁게 감싸며 볕을 받아 빛나는 안개가 만들어내는 그 숭고함과 신비감, 그 아우라는 마치 나라를 위해 희생, 헌신한 국가유공자분들의 정신이 후손들의 마음속에서 발하는 빛과 같이 느껴져 절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이끌어 냈다.

오는 7월 27일은 올해로 67주년을 맞이하는 정전협정일이자 유엔군 참전의 날이다.
국립이천호국원에 잠들어 계신 참전유공자분들과 대한민국을 구원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달려온 유엔군 참전유공자분들은 자유와 평화라는 가치를 마음에 품고 함께 전장을 내달렸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무력도발로 시작된 6․25 전쟁,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불과 두 달여만에 낙동강까지 후퇴할 정도로 전황은 나빴다.
90만 국군과 195만에 이르던 유엔군의 희생과 헌신으로 역전된 전황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교착상태에 빠졌고 이후 38선을 사이에 두고 정체된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유엔군․중공군․북한군 대표가 판문점에 모여 휴전 회담 제159차 본회의를 개최하고 총 5개조 63항의 정전협정서에 합의했다.
‘본 정전협정의 일체 내용은 1953년 7월 27일 22:00시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이 문장으로 4년 가까이 이어지던 전쟁은 막을 내렸다.

전쟁의 후유증은 컸다. 우리 국군은 15만 여명이 전사했고 13만 여명이 실종, 70만 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유엔군의 피해도 컸다.
4만 여명이 전사하고 11만 여명이 부상당하거나 실종되었다. 숫자로만 보면 피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2017년 만장된 국립이천호국원에 모셔져 있는 참전유공자분들은 총 50,002위다. 전사한 유엔 참전용사분들의 유해만으로도 국립묘지 1개를 따로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산자락을 따라 국립이천호국원의 야외봉안담을 오르다 보면 많은 표정들을 만나게 된다. 호국원에 잠든 유공자분들을 만나러 온 사람들은 더러는 울고 더러는 웃는다.
하지만 그 표정만으로 그들의 삶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추측하기는 쉽지 않다. 누군가가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삶의 이야기는 바람 앞의 안개처럼 흩어져 흔적도 남지 않게 된다.

서구 사회 젊은이들 사이에서 6․25 전쟁은 잊혀진 전쟁으로 불린다고 한다. 슬픈 일이다. 이름 한번 들어본 적 없는 나라와 그 국민을 위해 싸우다 잠든 유엔참전용사들의 이야기를 그들은 잊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분들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는 우리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해 남겨져 있고 살아가고 있다. 어떤 것을 해야 하는 것일까? 유엔군 참전의 날을 맞아 깊고 천천히 생각해 본다.

이강준 국립이천호국원 시설팀장 icjn2580@hanmail.net

<저작권자 © 이천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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